📮 안녕하세요. 서형이에요. 두번째 편지를 보내요. 유럽은 곳곳에서 크리스마스마켓이 열리고 있어요. 크리스마스를 이렇게까지 기대해본 적이 없는데, 매일 트리를 보고 트리를 만드는 사람들을 보고 마켓에 온 가족들을 보면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이곳의 밤은 아주 일찍 찾아와요. 3시 반이면 어두워지고 5시면 아주 깜깜해요. 어둠이 너무 길어서 시계를 의심할 때마다, 왜 크리스마스마켓이 곳곳에 있고 핫와인을 마시는지 깨달아요.
9월 10일날 체코로 날라온 후 100일이 지났어요. 100일이면 정말 많은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어요. 이제는 아침에 일어나 조식 반찬을 담고 손님들과 가벼운 수다를 떨면서 아침을 먹고 청소를 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어요. 100일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고 무엇이 바뀌었고 또 무엇은 바뀌지 않았는지 담아보고 싶은 편지예요.
✉️ : 편지
📓 : 일기장 발췌
📦 : 수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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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 100일 정산
민박집 두 곳에서 스텝으로 일하며 숙박객 100명 이상을 만나 밤마다 이야기를 나눴다.
버스 혹은 기차를 타고 베를린과 뮌헨, 퓌센, 체스키크룸로프, 부다페스트, 드레스덴, 빈을 다녀왔다.
오페라 3번, 오케스트라 2번, 발레 1번, 미술관 11곳.
프라하 플리마켓을 6번 다녀왔다.
10권의 맥니멀리스트 노트를 채웠고 엽서 종이에 42개의 그림을 그렸고 아침 일기장은 절반을 채웠다.
카메라로 3000장 정도의 사진을 찍었고 핸드폰은 맨날 용량이 없다고 찡찡거린다.
두 편의 뉴스레터를 보냈고, 두 개의 영감 노트 콘텐츠를 만들었다.
첫 두 달간은 한 번도 책을 읽지 못했고, 나머지 기간 동안 5권의 책을 읽었다.
26명이 스마일 프로젝트에 참여해주었다.
생각지 못한 외주를 2개 받아서 50만원을 벌었다.
한국에서부터 진행하던 펀딩을 프라하에 와서 마무리했다.
체코로 오는 비행기에서 영상 콘티를 짰던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아 200만원을 벌었다.
머리를 볶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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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라하에 도착한 시간은 자정쯤이었다. 첫날은 수분크림을 아주 듬뿍 바르고 숙면했다. 사장님이 데리러 오지 않았다면 더 힘들었겠지. 너무 건조해서 숨쉬기 힘들다. 2시부터 6시 반까지 잤으니까 4시간 반. 자고 일어나니까 근육통이 꽤 있었다. 짐을 먼저 꺼낼 것과 나중에 꺼낼 것들을 구분하여 두는 동안, 밖에서는 민박집 8살 아기가 꺄르르하며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천장에 비스듬히 달린 창문 두 개를 보며 오늘 프라하는 맑구나 하며 안도했고, 9시가 되자 애기가 똑똑 문을 두드렸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쑥스러워하던 애기는, 내가 아침을 먹으며 사장님과 이야기하는 동안 슬금슬금 옆으로 왔고 내 귀걸이에 관심을 보였다가 괜히 삼촌에게 매달렸다가 그림을 가지고 와서 자랑도 하고 분주했다. 조금 충격이었던 건 나에게 이모라고 하는 것이다. 언니라고 몇 번 고쳐줬는데 이제 고쳐주기도 민망하고, 포기해야 하나보다. 사장님이 차려주신 아침밥은 엄청났다. 너무 잘 먹은 탓에 점심이 되어서도 밥 생각은 안 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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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장님은 일을 가르쳐주시는 것을 미루고, 관광객 모드로 이 민박집과 프라하를 느껴보라고 하시며, 이틀 휴가를 주셨어요. 덕분에 휴가기간동안 저는 관광객이 되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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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광객모드 이틀 차이자 마지막 날. 어제와 같은 코스로 자연스레 걸었다. 월요일 출근하는 직장인들 사이에서 관광객이라니, 자꾸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억지로 막았다. 내 눈에 들어온 건 간판들. 간판들이 건물을 해치지 않으면서 조화롭게 붙어 있다. 아니, 보통 그려져 있다. 입체 간판도 조그맣고 귀엽다. 이 간판들을 모아볼 생각에 설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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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손님을 받았던 이야기
스텝으로 일하고 싶다고 생각한 건, 취업이라는 큰 산을 오르기 전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서였어요. 나랑 전혀 다른 세상에 살던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바로 민박집이니까요. 게스트하우스를 차려보고 싶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뭉뚱그려 생각하던 꿈 중 하나기도 했고요. 그래서인지 많은 구인글 중에서 유독 눈에 들어온 것이 '첫 스텝'을 구한다는 말이었어요. 아직 아무것도 없을, 내가 가서 함께 무언가를 향해 걸어가며 하나의 집을 만들어갈 모습을 상상만 해도 설렜거든요. 사장님과 매니저님, 그리고 저는 손님을 받기 위해 방 사진을 촬영/보정해서 플랫폼에 올리고, 집 안 곳곳의 문구를 제작하고, 포스터를 붙이고, 청소하고, 심지어 체크인 시뮬레이션까지 했어요. 첫 손님을 받았던 날의 기억이 선명해요. 집에서 꽤 먼 이케아에 가 있느라 첫 체크인 소식을 뒤늦게야 알았는데, 비행기 결항으로 갑작스레 숙소를 찾으신 모녀 손님이었어요. 발을 재촉하며 집으로 향할수록 점점 긴장되었어요.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 거울로 손님분이 앉아계신 게 보였어요. 와 떨린다. 부담되지 않게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건네기 위해서 일하시던 손님 옆에서 저도 일을 시작했어요. 손님은 타이핑하고 저는 가위질을 했죠. 그림책 출판과 편집일을 하시는 손님은 딸의 첫 회사 입사 전 모녀 여행을 하고 계셨어요. 나도 엄마랑 나중에 이렇게 여행해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편안하게 질문하고 대화하려고 노력했고, 손님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매니저님이 잘한다고 해주셨던 기억이 나요. 하루뿐이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진 못했지만, 두근두근하며, 아 나 이 일 잘 할 수 있겠다, 재밌다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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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9월 19일의 일기 : 일에 빠지는 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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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브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 다행이다. 내 능력을 십분 활용하시는 사장님과 일을 해서 다행이다. 나는 칭찬과 인정과 응원이 연료임이 틀림없다. 물론 사장님의 밥심도 크지만 나를 배려해주시고 인정해주시고 가끔은 신기해하신다. 작은 쪼가리들을 모으고 기록을 하고 그림을 그리는 것을. 그렇게 표현해주시는 것도 감사하다. 열심히 일하고 싶어지는 것도 당연하다. 길을 나서면 항상 맛집과 좋은 장소도 추천해주신다. 살도 찔 거다 분명... 사장님 칭찬들은 하나하나 다 다르다. 오늘은 인간라벨기라고 하심. 사장님 부부가 여기까지 온 여정을 상상하며 듣는 것도, 일을 분배해 하시는 것도, 가끔 걱정하며 한숨을 내쉴 때도 그저 멋지다. 30대 중반에 닿아 인생을 아예 새롭게 하는 것. 나도 얼핏 상상은 해보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생활하시는 분이 있어서 신기하다. 그 시작을 바로 옆에서 관찰하고 돕고 함께 만들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첫 민박집 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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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심으로 일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겁니다. 인정하시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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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디자인들을 했습니다. 모든 방에 저의 글씨가 붙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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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12일, 몇 번째인지 모르겠는 새 노트 첫 장의 일기
벌써 몇 번째 노트인 거지? 아직 한 번도 지난 기록을 펼쳐보지 않았다. 늦게까지 페인트칠하고 머리만 질끈 묶고 구시가지 광장으로 나왔다. 노트와 펜만 손에 들고. 무언가를 찍어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카메라는 챙기지 않았고 어딘가로 향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방도 싸지 않고 나왔다. 구시가지 광장에는 관광객이 많다. 하지만 백색소음으로 들릴 만큼 이곳은 넓고 사람들은 소란스럽지 않다. 내가 가장 먼저 찾은 프라하의 관광지라서인지, 지도를 보지 않아도 찾아올 수 있을 정도로 높은 틴 성당이 있어서인지, 앉을 곳이 많아서인지, 빛이 잘 들어오는 곳이라 그런 건지. 나는 이곳에 오면 마음이 편해진다. 예쁜 색깔의 비둘기가 내 옆을 지난다. 노을빛이야. 어스름쯤의 노을에 먹구름이 살짝 낀 것 같다. 이런저런 비둘기가 다 있네. 베를린에 다녀오니까 프라하의 건물들이 참 낡고 질서도 없고 규칙도 없어 보이고 과해 보이기 까지. 층수도 다 다르고 색깔도 어중간, 얼룩덜룩, 처음에는 정말 아름답고 공들인 듯한 건물들 사이에서 감탄했는데 이제 이렇게 느끼는 것이 가소롭기도 어이없기도 하다. 다시 작은 관찰과 발견의 즐거움을 일상에 끌어오고 싶다. 종종 중국 상해에서 보냈던 한 달이 떠오른다. 밤에 자전거 타고 후카하러 가는 것, 나이차를 많이 마신 것, 학식에서 무엇을 먹을지 고민한 것, 친구를 사귄 것, 다 기억에 남지만 가장 떠오르는 건 학교 수업이 끝나고 오늘은 어떤 박물관에서 어떤 그림을 그릴지 상상하고 고민했던 짧은 일상이다. 나에게 유럽에서의 순간은 과연 어떻게 남을까? 한량 했던 시절? 단순노동을 했던 시절? 나중에 어떤 미화 작업이 있을지 모르겠다. 어젯밤 사장님 부부와 이야기하다가 나도 모르게 '저는 프라하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걸 꼽으라 하면 민박집에서의 일을 말할 것 같아요. 사장님의 시행착오, 도전의 과정, 애기가 유럽학교를 다니며 크는 모습, 전혀 다른 세상에 살던 손님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면서 세계가 확장되는 것 같았거든요.' 매니저님의 '도울 때는 확실하게 도와라.', '아니다 싶으면 옆으로 찔끔 옮기는 것이 아니라 과감히 다른 방향으로 각도를 틀어서 비춰라.', '꿈꾸는 것이 그래서 중요해. 현재에 충실하면 어떻게든 꿈꾸던 그 방향으로 가게 되거든' 등과 같은 조언을 하실 때나 사장님의 '서형 씨는 미원 같은 사람이야. 우리가 준비해둔 것에 마법 같은 조미료로 완성도를 높여줬거든' '정이사' 같은 기억 남는 칭찬을 해주실 때마다 첫 숙소가 이렇게 좋아서, 내 작은 재능을 활용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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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텝 일을 되돌아보며
적어도 100명의 손님을 받으면서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날이 잦았어요. 잠깐 나눈 대화에서도 호기심이 잔뜩 생기는 사람이 있었고, 알면 알수록 더 궁금해지는 사람도 있었거든요. 그런 사람들은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졌어요.
30유로의 팁 주고 가신 손님, 함께 재즈바와 빈티지마켓을 갔던 첫 주의 손님들, ‘그럼요’라는 말을 자주 하셨던 미소천사 손님, 세자매 손님, 나에 대해 많이 궁금해해주신 세계여행 부부님, 아낌없이 부업 정보를 주시던 재능기부 손님, 공무원 시험 합격하시고 여행 온 어린 손님, 제대하고 2주 만에 나온 손님 ... 처음에는 손님 한 분 한 분과 깊은 이야기를 하고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다가, 시간이 지나고 바빠질수록 어떤 손님이 오셨는지 성함도 여쭤보지 못하고 보낼 때가 많아졌죠.
생각하지 못한 일들과 나의 생활 반경에 전혀 없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내 안에 숨어있던 나의 여러 가지 모습과 취향을 깨달았어요. 아 나는 이런 사람이었구나. 감자와 오이와 하와이안 피자를 많이 싫어하는 구나, 노란 불을 약하게 틀어두고 가사가 들릴 듯 말 듯한 노래를 틀어둘 때 가장 편안해지고 일기가 잘 써지는구나, 자꾸 침대에 눕고 잠들고 싶은 것이 체력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일상을 다루는 방법이구나. (이건 조금 핑계일수도)
모든 것들을 선택하고 또 책임져야하는 상황에서는 ‘나’라는 존재와 자꾸 더 강하게 부딪히는 것을 느껴요. 그런 마주침이 때로는 상처가 되기도 하고 회복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어떻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스스로를 볼 수 있어요. 이곳에 와서 바뀐 것이 아니라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구나를 확신해요. 이런 시간을 보내길 바랬는데, 어쩜 다행이죠.
📓 10월 19일의 일기 - 선물을 받은 날
공모전 상금으로 연어를 쏘는 날. 얻어먹은 것도 그동안 많고 잘 지내다가는 것에 감사드리기 위해 큰 맘 먹고 연어를 산다고 했다. 체코는 내륙 국가라서 생선이 정말 비싸다. 어쨌든. 어제는 사장님이 칸티나라는 정육식당에 데려가주셨다. 비싸서 먹을 엄두도 못 내고 있었던 에이징된 티본스테이크와 카르파치오를 시켜주셨다. 정말 맛있었다. 음식에 감탄하고 있는 순간, 사장님이 가방에서 무지개색의 무언가를 꺼내시면서 선물이라고 하셨다. 큼지막한 사이즈의 멋진 포장지를 두른 선물. 너무 생각도 못한 선물을 받아 놀랐고, 생각해주신 것에 대해 정말 감사했고 감동이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사실 여기서 좋은 시간을 보낸 건 나인데 어쩌면 평생 안고 갈 소중한 추억과 길의 방향을 조금이나마 틀어준 감사한 분들인데 내가 선물을 받아도 되나 싶었다. 일에 지치거나 멍때리거나 졸립거나 힘이 딸릴 때가 종종 있었지만 사장님 부부가 챙겨주실 때면 다시 마음을 다 잡기도 했다. 고마웠었다면서 유로 용돈도 함께 챙겨주셨고, 선물은 잠옷이었다. 잠옷을 하나만 챙겨온 내가 조금 짠해보였나보다. 어쩜 이렇게 색도 도브리 색깔로 예쁜 핑크색일까. 입을 때마다 사장님의 쨍한 색감의 옷들과 감각적인 도브리의 디테일들이 떠오를 것 같다. 잠옷을 고르고 편지를 쓰고 포장지를 두르는 그 시간에 더 감동을 받았다. 짧게 지나가는 스텝이었지만 나도 그렇고 사장님도 그렇고 진심은 언제나 통하는구나 싶었다.
'처음'이라는 것에 나는 사실 의미를 크게 둔다. 처음이니까, 처음인데도, 처음이라서, 처음에는, 처음처럼, 처음. 배울 수 있는 것이 많았다. 사장님의 작은 고민들까지 합치면 적어도 100개의 고민을 함께 했다. 조식, 포스터 배치, 글귀, 방 안내, 방 사진 등 여러 문제에 대해 함께 이야기 해 볼 수 있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서 다행이었다. 우스갯소리로 자주 말했던 것처럼 정말 내가 여기를 인수하게 되는 날도 오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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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번째 집의 마지막 날, 민박집 가족과 민박집에 머무를 손님들에게 남긴 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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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과 매니저님께.
편지를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슬프네요. 마지막 날을 앞두고 도브리에서 일어난 이런저런 일들이 생각해봤어요.
아침에 실험대상이 되어 브런치 두 접시를 먹은 것도, 숙소에만 있는 저를 끄집어데리고 나가서 맛있는 음식을 사주시고 좋은 풍경을 보여주신 것도, 궁금했던 인생 첫 페인트칠도,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매니저님의 세바시 강연도, 날씨가 아주 화창했던 날 아침 청소를 미루고 공원에 가서 냅다 누워있었던 것도, 포동포동 살오른 제 볼살을 보며 얼마나 잘 지냈으면 이렇게 되었냐고 서로 웃었던 것도 ㅎㅎㅎ 도브리에서 기대도 하지 않았던 많은 사랑을 받아서 아직도 마음이 벅차요. 프라하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고민도 하지 않고 사장님과 매니저님 사이에서 경험한 것들이라고 이야기할 거예요. 어쩌면 제가 가장 목표로 하고 왔던 ‘인생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을 이곳에서 해낼 수 있었어요. 아낌없이 조언해주고 챙겨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곳저곳에 제 흔적을 남기고 갈 수 있어서 정말 기뻐요. 저도 몰랐던 제 능력을 끌어내시고 일으켜 세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여주시고 좋은 추억을 남길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신 것도 정말 감사해요. 잊을 수 없을 거예요!
방명록.
도브리의 첫 번째 스텝 서형이에요. 도브리의 오픈을 함께 하며 손님 한 분 한 분과 친해졌던 시간도 있었는데, 어느덧 20명 만실이 되어 손님들 한 분 한 분의 이름을 외우기 어려운 날도 왔네요. 손님들의 방명록과 후기를 보며 스텝이라는 글자 하나만 나와도 속으로 방방 뛰며 기뻐했는데 이곳에 글을 남기니까 마음이 먹먹해요.
사장님과 매니저님은 언제나 손님들의 편안한 휴식과 뜻깊은 추억을 서포트하기 위해 세세한 것들 하나까지 신경쓰고 고민하셨어요. 예쁜 접시와 컵뿐만 아니라 식탁보, 이불커버, 커튼도 여러 디자인이 있어요. 꽃도 주기적으로 공수해오신답니다. 무엇하나 그냥 완성된 것이 없는 이 곳에 오신 여러분들은 아마 운도 좋고 촉도 좋으신 분일거예요.
두 달 가까이 머물면서 저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제 모습을 많이 발견했어요. 손님들과 아침밥을 함께 먹거나 저녁에 와인을 마시면서 나눴던 대화 속에서 인생의 꿀팁을 얻기도 하고 삶의 태도에 대해서 많이 배웠어요. 손님분들도 더 많은 것들을 이 곳에 두고 가시고 나누시고 얻어가시길 바라요. 그리고 되도록 사장님께 ‘프라하에서 어쩌다 민박을 하시나요?’라는 질문은 조금 참아주시거나 차라리 다 같이 모여있을 때 한 번에 해주세요. 이미 같은 질문에 100번정도 답변하셨거든요 ㅎㅎ
서윤이에게
서윤이 안녕! 서형이언니이모야.
서윤이를 알게된지 벌써 두 달 가까이 되었네. 처음 서윤이가 쭈뼛쭈뼛 다가와 키를 건네주고, 그림 그릴 때마다 옆에 딱 붙어서 신기하게 쳐다보며 대단하다고 해준 모습이 떠오른다. 서윤이랑 같이 그림도 그리고 풍선껌도 부는 동안 언니는 진짜 행복했어. 처음에는 어려웠던 그림그리기와 풍선껌 불기가 지금은 쉬워지고 마냥 재미있어진 것처럼, 서윤이가 앞으로 하고자하는 모든 것들이 술술 잘 풀리길 바랄게. 초콜릿 달력은 12월 1일부터 24일까지 하루에 하나씩만 뜯는거야. 너무 일찍 줘버려서 기다리는 동안 힘들 수도 있지만 기다림에서 나오는 기쁨도 있거든. 서윤이가 그 기쁨을 꼭 알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항상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주위에 가득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 서윤이는 앞으로 엄~청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언니를 조금씩 잊어갈 수 있지만, 언니는 항상 서윤이를 기억하고 응원하고 있을게. 나중에 더 멋지고 예쁜 모습으로 세계 어디에서든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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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17일 일기
내륙이라 시도때도 없이 날씨가 바뀐다. 우중충한 날씨를 보고 나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나왔는데, 마법처럼 비가 개이고 몽실구름과 파란하늘이 나타나면 그제야 카메라도 챙길걸 후회하면서도 길을 나선 걸 행운으로 여긴다. 선물 같은 하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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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2일 - 내가 할 수 있는 것들
요즘 NPC 같은 느낌이 들어 (사실 잘 하고 있는거다) 또래손님들은 놀러만 다니는데 나는 청소기를 들고 있는게 조금 속상했다. 예쁜 노을을 등 뒤로 하고 집에 돌아와야했던 날도 있으니까. 근데 나는 오늘 내가 스텝이기 때문에 해줄 수 있는 것, 대화주제가 있고 내 자리에서만 보이는게 따로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만의 이야기가 쌓인다는게 참 멋졌다. 요즘 모으는 작은 것들도 정말 마음에 든다. 내 일상을 빛내주는 것들. 간판, 나무, 사람, 하늘 등. 그리고 사람들의 스마일 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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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14일 - 사치에 대한 일기
'이 풍경을 두고, 오늘 여기까지만 보고 집에 가는게 내가 부릴 수 있는 사치야' 라는 사진작가님의 글을 봤다. 맞다. 내가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치이자 여유다. 다른 친구들이 각자 다른 길로 부지런히 걸어갈 때 여기까지 온 나의 모든 여행이 어떻게 보면 사치다. 내 한정된 시간을 이 곳에 쓰며 사치 부리는 것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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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장을 받으면 기쁜 마음으로 읽고 소중히 간직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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